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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국 도깨비의 기원: 비형랑 설화, 두두리, 방이설화

miracle HM 2024. 5. 28. 17:28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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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국 도깨비의 기원: 비형랑 설화, 두두리, 방이설화

 
 
도깨비의 기원은 신라 시대의 비형랑 설화’, ‘두두리같은 풍요신 숭배, 흥부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방이 설화이다. 민속학자들은 목장신(목수), 야장신(대장장이), 자연현상 숭배의 기원이 있다고도 한다.
 
 

최초의 도깨비 이야기, 『삼국유사』 의 「비형랑 설화」

비형랑은 『삼국유사』 에 신비롭게 묘사된 인물로 반인반귀, 귀신과 인간의 혼혈로 도깨비를 부렸다고 한다. 신라의 25대 진지왕이 미녀라고 소문이 난 ‘도화부인’을 후궁으로 삼으려 했지만 남편이 있다며 거절당한다. 시간이 흐른 뒤 진지왕이 사망하고 도화부인도 과부가 된다. 귀신이 된 진지왕이 도화부인에게 나타나 7일 동안 함께 지내게 된다. 진지왕은 홀연히 사라지고 도화녀는 임신을 해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‘김비형’이다.
 

(출처: EBS 역사저널e)

 
이 소문을 들은 진평왕이 비형을 궁으로 불러 ‘집사’ 벼슬을 주며 키운다. 그런데 비형은 밤마다 월성(경주에 있는 신라의 궁궐)을 빠져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했다. 진평왕이 수상히 여겨 이를 감시하게 했더니 비형은 성 밖에서 귀신들과 놀고 있었다.
 
이를 알게 된 진평왕이 월성 북쪽에 있는 절 신원사 근처에 돌다리를 놓으라고 명령한다. 비형은 도깨비들을 부려 돌을 깎아 하룻밤 사이에 돌다리를 놓았다. 이 다리를 ‘귀교’라고 불렀다. 다리가 마음에 들었던 진평왕은 비형에게 조정의 정사를 도울 수 있는 귀신이 있는지 물었고, 비형은 ‘길달’이라는 도깨비를 추천해 인간으로 만들었다.

길달은 집사 벼슬을 받아 충직하게 정사를 돌보았고, 길달이 맘에 든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던 ‘임종’이라는 인물에게 양자로 들이게 한다. 임종은 길달에게 흥륜사 남쪽에 문을 세우게 했다. 길달은 밤마다 그 문루 위에서 잠을 자니 그 문을 ‘길달문’이라고 불렀다.
 
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가자 비형은 귀신들을 부려 길달을 잡아 죽였다. 그 뒤 도깨비 무리들은 ‘비형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서 달아나게 되었다고 한다.
 
 

두두리(두두을) 신화

두두리 또는 두두을은 삼국시대 신라와 고려시대에 경주 일대에서 숭배된 목각 우상이다. 이 신앙은 위의 「비형랑 설화」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.

 
「신증동국여지승람」 중에 ‘경주에 영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터는 본시 큰 못이었다. 그걸 두두리 무리가 단 하룻밤 만에 메우고 절을 지었다’, ‘비형이 있던 이후 두두리를 크게 섬겼다’라는 기록이 있다. 고려시대 무신인 이의민이 자기 집에 사당을 차려 두두리를 숭배했다고 전해지는 등 경주 출신들은 이사를 가서도 두두리를 숭배했다고 한다.
 

(출처: EBS 역사저널e)

 
이 두두리를 도깨비의 기원으로 보는 설이 있으며, 수백 년간 이어진 경주 지방 토속신이었던 듯하지만 여몽전쟁 이후 신앙공동체가 급감하고, 조선시대에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.
 
 

방이설화

방이설화는 형제지간의 이야기로 착한 형 ‘방이’는 보물 방망이를 얻고, 욕심 많은 동생은 형을 모방하다가 망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. 「흥부전」의 근원 설화로 여겨진다.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.

 
가난한 방이는 부자인 아우에게 누에와 곡식의 씨앗을 얻으려 했는데, 못된 아우는 못 쓰게 된 씨앗을 준다. 받아 온 누에에서 소만 한 누에 한 마리가 나오자 동생이 그 누에를 죽였는데, 사방에서 누에들이 방이의 집으로 날아들었다. 또 방이는 동생에게 받아 온 씨앗을 심었는데, 이삭 한 알이 한 자가 넘은 길이로 자랐다.
 
하루는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 곡식을 물고 산으로 날아갔다. 새를 쫓아간 방이는 숲속에서 붉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무엇이나 원하는 대로 나오는 방망이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게 된다. 방이는 아이들이 돌 틈에 두고 간 방망이를 가져와 큰 부자가 되었다.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우는 형을 따라 하다가 아이들에게 잡혀 코만 뽑히고 돌아왔다.
 
 
한국 도깨비의 묘사와 특징 / 일본 ‘오니’와의 차이점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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